D를 위해서라면 슬픔이 번져서도, 슬픔의 이유를 분명히 알아서도 안 된다
D와의 관계는 일종의 ‘시소 타기’ 같았다.
한쪽이 내려앉으면 다른 쪽은 공중에서 흔들리는 발을 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높이를 달리하며 자주 엉켰고 한쪽이 이유 없이 가벼워지기도, 무거워지기도 했다.
우리는 시소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시소를 탔다. 시소는 보이지 않았으니 완벽했고, 즐거움을 주었다.
간혹 둘 중 한 명이 시소에서 떨어지기도 했는데, 중력의 법칙처럼 자연스럽게 여겼다.
D는 새침하고 도도했다.
귀하게 자란 사람들에게서 풍기는 권태로움과 여유가 몸 곳곳에 배어 있었다.
D가 꽃이라면 웬만해서는 봉오리를 벌리지 않는 꽃일 것이다.
기다란 모가지와 보랏빛 꽃잎이 아름다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만, 웬일인지 활짝 피는 것은 어려워하는 꽃. 나비나 벌들이 몰려와 그를 구경하고 만지면그들에게 미소를 짓다 지치는 꽃에 가까울 것이다.
D가 책이라면 235페이지의 진실과 6페이지의 거짓,30페이지의 비밀로 이루어진 책일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 불을 켜고 앉아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소설.
이별에는 두 종류가 있다. 광장 한복판에서 브라스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하는 이별과 꽃기린의 꽃이 피었다 지는 속도로 천천히 다가오는 이별.
D와 나의 이별은 후자였고 당시에는 이별을 인지하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우리가 시소에서 내려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때 그 시소가 지금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딱 한 번 D를 다시 만난 적이 있다.
제주도 비자나무 숲에서였다.
그는 반달만큼 어두워져 있었는데, 지난 날 D가 흐린 해에 가까웠다면 비자나무 숲에서 그의 모습은 반달만큼 어두워 보였다는 뜻이다.
우리는 비자나무 아래 숨은 버섯처럼 말없이 서 있었다.
그 옛날 우리가 그늘에 대해 진지했으며 뿌리에 대해 어느 정도는 비겁했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D는 비자나무와 남쪽과 바람에 대해 이야기했고,
나는 나무의 나이와 냄새, 참을성에 대해 얘기했다.
그날 우리는 비자나무 아래에서 마지막 시소를 탔고,
시소를 두고 왔다.
D를 생각하면 지금도 슬픔을 압지로 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압지에 눌린 슬픔은 번지려다 실패한다.목적을 잃고 자연스럽게 날아간다.
D를 위해서라면 슬픔이 번져서도, 슬픔의 이유를 분명히 알아서도 안 된다.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 모든 것을, 정말로, 잃어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박연준의 <소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