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신의 유언장
윤종신의 유언장
새소리와 함께 밝게 떠오르는 태양이 있는 아침
남들은 새로운 다짐을 하고
활기차게 하루를 준비하는 아침에
나는 유서를 쓰고 있습니다.
천성이 게으르고 뒷심이 부족해서
그럭저럭
고만고만
있으나 없으나 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던 학창시절
그나마 노래는 유일하게
내가 꾸준하게 할 수 있었고
지칠때마다 찾는 쉼터 같은 곳이었어요.
우연히 만난 실력있는 형들 틈에 끼어서 데뷔하게 되고
그 형들의 성공에 난 엉성한 실력으로
살짝 내 이름을 거기에 얹게 됩니다.
이렇게 운좋게 풀린 인생많은 사람들이
내 노래, 내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눈물 흘려주고… 웃어주고…
전 참 과분한 인생을 산 것 같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제 인생을
더욱 더 살만하게 해준 내 가족들.
평생을 장애인들과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봉사하며 살아오신 아버지
어렸을 때는 힘든 형편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전 잠시 방황도 했지만
은퇴하실 때까지 45년을 단 한번도 다른 쪽을 바라보지 않고
봉사만을 하신 아버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사회사업가 혹은 남을 위해 사신 분들의
아내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만큼 존경 받아야하고 인정 받아야하는 우리 엄마.
좁은 집에서 두아들과 씨름하며
힘든 살림에도 피아노 학원 보내고 싶고 과외도 시키고
남들 하는 것 다 시키고 싶으셨던
엄마의 마음 다 알아요.
당뇨와 싸운지 벌써 15년쯤 됐죠?
갈수록 얇아지는 엄마의 다리
나랑 라익이랑 다녀야 할 곳도 많은 데
자꾸 집에만 계시겠다는 엄마.
이제는 산책도 자주 하시고요.
빨리 건강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미라야
좋은 사람 많았는데 자기 재능을 덮고
나의 아내와 라익이 엄마라는 일에만 몰두하게 됐네.
음악한다기에 낭만적인 줄 알았는데
애정표현도 못하고, 지병도 있고
뭐 하나 멋진 걸 보여주지도 못하고
이렇게 오빠가 간다.
자기가 바꾼 내 인생이제 2년밖에 안 됐지만 최고였어.
내 인생에 뚜렷한 목적을 만들어줬고
내 모든 걸 단 한사람을 위해서버릴 수 있다는 생각도
미라 너때문에 하게됐다.
많은 걸 남기지 못하지만
저작권료는 쏠쏠할꺼야. 사후 70년까지니까.
라익이 학비하고 장가보낼때까지 그럭저럭 되려나
정말 너무너무 사랑했다, 미라야
마지막으로 라익아 네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쯤에
아빠는 없겠네
아빠는 훌륭한 업적은 없지만
그냥 둥글둥글 잘 살았어.
라익이가 살면서 아빠이름이 창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커서 결혼하게 되면 내 며느리한테
시아버지는 많이 웃다가 웃기다가
노래하다가 잘 살고 가셨다고 얘기해줘.
술은 괜찮은데 담배는 피지마라.
건강하게 자라줘.
그리고 이것저것 여러가지 하는 이미지때문에
혼란스러우셨던 팬 여러분
제 멜로디, 이야기, 웃음들가끔씩 떠올려주세요.
그게 다 윤종신이고요.
한 우물은 못 파고
번잡하게 여러가지 하면서 살았지만
그 모든 곳에 윤종신의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요.
나중에 여러분도 세상을 뜨면그때 봐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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